지단 비디오(Zidane Video) - 축구 유튜브 채널 추천 및 짧은 감상 축구 글



※ 영상이 많습니다.


지단 비디오(Zidane Video)


  예전에 비해 축구를 즐기는 시간이 줄어들고 평소 유튜브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어서 유일하게 구독 중인 축구 주제 유튜브다. 우리나라 분이 운영하는 채널로, 전 세계에서 지단 경기 영상이 가장 많고 그 내용도 알차다. 시중에서 찾기 어려운 경기가 많고 하나의 장면에서 호흡을 유지하는 편집 관점도 잘 맞아서 보기에도 편하다. 특히 지단의 프랑스 대표팀 경기 영상은 프랑스 방송사의 중계 영상을 일일이 찾고 중요한 장면에서는 교차편집도 더하는 정성이 돋보인다. 

  최근 이 채널에서 풍부한 영상 자료를 바탕으로 지단의 시즌별 컴필레이션 영상을 제작했는데, 그 내용이 충실하여 특별히 소개한다. 채널 운영자분이 개별 영상들을 꾸준히 업로드한 것을 즐겁게 지켜본 구독자로서, 수많은 경기들을 시즌 종합 영상이라는 새로운 결과물로 정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예전에 <키커>의 랑리스테(시즌 전/후반기로 나누어 그 활약상을 평가)를 모티브로 지단의 경력을 짚어보는 글을 쓰려다 말았는데, 이 소개글에서 영상과 함께 각 시즌의 평가글을 덧붙인다.




지네딘 지단 - 1999-2000시즌

1999-2000시즌
전반기(1999년 하반기) : WK (Weltklasse 월드 클래스 : 세계 최고 수준의)
후반기(2000년 상반기) : WK

  개인적으로 지단의 유벤투스 커리어 중 가장 좋아하는 시즌이자 안첼로티 감독의 두 번째 시즌. 지난 시즌(1998-99) 하반기에 입은 부상에서 회복한 뒤 곧바로 자신의 폼을 되찾았다. 지단이 유로 2000에서 보여준 위대한 모습은 이 시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펄럭거리는 카파(Kappa)의 비안코네리 저지가 지단의 유려한 움직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시즌 유벤투스는 필리포 인자기가 리그에서 15골을 넣으며 준수했지만, 리그에서 9골을 넣은 델 피에로는 8골이 PK이고 33라운드에서야 넣은(당시 세리에는 한 시즌에 34경기) 헤더가 유일한 필드골이었다. 서드 공격수인 코바세비치는 리그에서 주로 교체로 나와 한계가 있었다(그래도 리그 6골 기록). 공격진들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유벤투스는 전반기 리그에서 단 1패만 기록하고 33라운드까지 1위를 유지했지만, 마지막 34라운드인 페루지아 원정에서 0-1로 패하고 말았다. 결국 같은 시간에 승리를 따낸 라치오에게 승점 1점차(라치오 72점, 유벤투스 71점)로 역전당하며 아쉽게 스쿠데토를 내주었다.
  세리에A 올해의 선수(Oscar del Calcio)에서는 세 번째 올해의 외국인 선수 최종후보에 올랐지만, 세리에A 데뷔 시즌에 카포카노니에레(세리에A 골든부츠)를 따낸 안드리 셰브첸코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필드 위에서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이 시즌은 WK로 평가하기 충분하다.


지네딘 지단 vs 파르마 (1999-2000 세리에A 16라운드)


  세계 최고의 팀이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강력함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프랑스는 그 이상향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세계 챔피언에 오른 이후에도, 프랑스의 모든 플레이는 지단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1999년 하반기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유로 2000 예선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이전 유로 예선 7경기 중 3경기만 나온 지단은 남아있는 세 번의 예선 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프랑스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아이슬란드를 격파하고 극적으로 1위에 오르며 유로 2000 본선에 직행한다. 그 외 시즌 중에 열린 A매치에서는 4경기를 뛰었고 모두 승리했다. 지단은 언제나 막중한 역할을 맡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보답했다.

* 시즌이 끝나고 프랑스 대표팀은 하산 2세 대회(공식 A매치)와 유로 2000에 참가했다. 실제 <키커>는 여름에 열리는 국가대표팀 대회가 끝난 뒤 여름 평가를 발표하기 때문에 위 대회도 반영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생략하더라도 이 시기 지단의 퍼포먼스는 당연히 WK다.


지네딘 지단 vs 슬로베니아 (2000년 4월 26일 국가대표팀 친선 경기)




지네딘 지단 - 2000-01시즌

2000-01시즌
전반기(2000년 하반기) : WK
후반기(2001년 상반기) : WK

  유로 2000 이후 지단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당대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는다. 물론 비교되는 선수들은 있었지만 결론은 지단이었다. 새로운 시즌에서도 이전부터 이어온 뛰어난 활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평가에서 고민한 점은 활약 자체가 아닌 스포츠맨십 문제였다. 챔피언스리그 데포르티보전과 함부르크전에서 지단이 연속으로 받은 퇴장 중, 특히 함부르크전에서 저지른 박치기 행위는 지단이 2000년 발롱도르를 놓치고 같은 해 피파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도 영향을 준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흠결 때문에 발롱도르를 놓치긴 했지만 지단은 수상자인 피구보다도 더 많은 1위표를 받았고(지단 1위 24표, 피구 1위 20표), 피파 올해의 선수는 두 번째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지단 1위 59표, 피구 1위 38표). 이처럼 개인상에 적용된 불이익이 본래의 퍼포먼스까지 가릴 수는 없기 때문에, 2000-01시즌 전반기 평가도 월드 클래스로 결정했다.

** 2010년 <르 퀴프>의 Vincent Duluc은 함부르크전의 박치기 퇴장이 지단의 2000년 발롱도르 수상을 막은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2000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8명의 기자가 지단의 비신사적인 행위를 지적하며 투표명단(기자 1인이 5위까지 선정)에서 아예 제외했고, 또다른 10명의 기자도 이 행동을 이유로 순위를 내렸다. 발롱도르의 투표 기준 중 하나인 '스포츠맨십'이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로, 지단은 최소 18점을 잃으며 발롱도르마저 놓치고 말았다. 2014년 피파-발롱도르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23인 후보에서 탈락한 것도 같은 사례다.


  후반기의 지단은 특별한 논란 없이 일관적으로 좋은 폼을 유지했다. 이전 시즌부터 꾸준히 뛰어났지만 전 시즌에 비해 스탯은 크게 늘어났는데(리그 6골 15어시), 이는 공격진이 폼을 많이 회복한 덕분이 크다. 인자기는 전 시즌에 비해 하락했지만 델 피에로가 극심한 부진에서 조금 벗어났고, 새로 영입된 트레제게가 지단과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침체되있던 공격진에 힘을 더했다. 여전히 교체로 대부분 출전한 코바세비치는 이 시즌 지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세리에A 올해의 선수에서는 또다시 올해의 외국인 선수 최종후보에 올랐고, 올해의 외국인 선수(통산 두 번째) 뿐만 아니라 올해의 선수까지 차지했다. 외국인 선수 부문에서는 라치오의 에르난 크레스포(2000-01 세리에A 카포카노니에레)와 피오렌티나의 루이 코스타를, 전체 올해의 선수에서는 로마에서 역사상 세 번째 스쿠데토를 얻은 토티를 제쳤다. 선정 당시 지단은 이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서 다른 후보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였지만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지단은 유벤투스에서 뛴 다섯 시즌 동안 외국인 선수 최종후보에 네 번 포함되었는데, 이것 또한 흥미로운 기록이다.
  이 시즌 중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여러 A매치에만 출전하고(A매치 5승 1무 1패). 시즌 직후 열리는 컨페더레이션스컵에는 불참했다. 지단은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의 순수한 기량으로서 사람들에게 경탄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네딘 지단 vs 포르투갈 (2001년 4월 25일 국가대표팀 친선 경기)



지네딘 지단 - 2001-02시즌 (도메스틱 컴필레이션)

2001-02시즌
전반기(2001년 하반기) : WK
후반기(2002년 상반기) : WK

  당시 역사상 최고 이적료(7750만 유로)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첫 시즌. 시즌 초 팀의 성적이 좋지 않자 지단이 함께 비판받기도 했지만, 사실 이때도 지단은 리가에서 네 경기 연속으로 골을 넣고 있었고 그 활약상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탁월했다. 세기의 이적으로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지단은 새로운 리그와 클럽, 낯선 위치에서도 편안히 뛰며 최고의 모습을 보였다. 베르나베우는 지단의 장엄한 공연장이었다. 코파 델 레이 결승에서 데포르티보에게 연장전 끝에 우승을 내주기도 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영원한 라이벌 바이에른 뮌헨과 바르셀로나를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그 유명한 '발리 골(The Volley)'을 넣으며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지단은 독보적인 최고였다. 터프하면서도 유려하고, 역동성과 유연함이 가장 균형잡힌 이 시즌이 지단의 정점이다.


정확히 20년 전 탄생한 골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월드컵 예선을 면제받은 덕분(월드컵 우승국)에 친선 경기만 출전했고, 이전 시즌들부터 계속 (당시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매 경기 다른 세계에서 볼을 차고", "모든 것을 해내"고 있었다. 지단이 출전한 프랑스의 모든 경기는 지단이 절대자였고, 프랑스를 상징하는 예술성도 곧 지단이었다. 월드컵 직전 우리나라와 평가전 중 당한 부상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서 정상적으로 뛰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2001-02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후 여러 언론 반응 - '지단이 펼친 위대한 아홉 번째 연주'

2001-02 라리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돈 발롱, 스페인과 외국인 선수를 분리해서 선정)
2001-02 라리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스페인 엘 파이스)
2001-02 UEFA 올해의 선수
2002 엘 파이스(우루과이) 선정 유럽 올해의 선수(유럽의 왕 - Rey del Fútbol de Europa, 기자단 투표 방식)
2002 피파 올해의 선수 3위
2002 발롱도르 4위


지네딘 지단 vs 덴마크 (2001년 8월 15일 국가대표팀 친선 경기)

지네딘 지단 vs 스코틀랜드 (2002년 3월 27일 국가대표팀 친선 경기)


  현재는 지단의 2002-03시즌 라리가, 2003-04시즌 도메스틱 컴필레이션 영상이 새로 업로드되었다. 다만 저작권 때문에 외부 링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채널에서 직접 감상해야 한다) 두 시즌에 대한 평가는 짧게 쓴다.


지네딘 지단 - 2002-03시즌 (라 리가 컴필레이션)

지네딘 지단 - 2003-04시즌 (도메스틱 컴필레이션)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는 피파 올해의 선수 수상의 영향 때문인지 2002-03시즌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역동성과 유연함이 가장 균형잡힌(어쩌면 이탈리아와 스페인 축구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 2001-02시즌을 독보적인 최고라고 본다. 2002-03시즌부터 지단은 스페인 축구의 느슨함(?)에 적응하면서 이전까지 보여준 다이나믹함이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즌에도 보는 즐거움과 성과를 모두 거두며, 자신이 세계 최고임을 또다시 각인시킨 점(당대 평가 또한 그랬다)은 높이 평가한다.


  2003-04시즌은 엄청난 주전 혹사로, 마지막 한 달 반 동안 클럽 전체가 무너지며 마무리가 좋지 않아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아서 아쉽다(유로 2004 결과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03-04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단순히 마켈렐레 이적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다). 실제로는 시즌 후반기인 2004년 3월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모든 대회에서 순항했고 지단 역시 절정의 폼을 유지했다. 그래서 시즌 중인 2003년 말부터 2004년 중반까지, 현지 언론들에서는 지단과 역대 최고 선수들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지단은 이 기간에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다시 수상하며 그 활약을 인정받았다(이 논쟁은 시즌이 끝난 뒤에도 지속되었다).

  지단의 역대 최고 논쟁 사례는 선수로서 평가할 만한 퍼포먼스와 경력이 충분히 쌓인 상태에서 전반적으로 폭넓게 이루어졌는데, 직전의 사례인 호나우두가 기대 심리(젊은 나이, 브라질, 펠레라는 롤 모델 - 자연스럽게 마라도나까지)와 미래의 활약상을 예상 반영한 내용이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두 논쟁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루카 모드리치에게 찬사를 보내는 앙리와 퍼디난드 축구 기타 자료


  이틀 전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연장 끝에 첼시의 추격을 따돌리고 준결승에 진출하자, 37세임에도 중요한 경기마다(이번 경기 뿐만 아니라 지난 16강 파리 생제르망을 상대로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루카 모드리치를 향해 축구계 여러 인사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혹사당한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레알 마드리드의 핵심으로서 꾸준히 활약하는 모드리치의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이룬 훌륭한 성과와 더불어 오랜 맞수였던 샤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확고하게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는 여론을 만들었다. 샤비, 이니에스타와 같은 팀에서 뛴 앙리마저 셋을 나란히 놓은 것처럼, 정체되어 있던 사람들의 인식까지 뒤늦게나마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평가가 완전히 자리잡을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이틀 전 챔피언스리그 생중계를 마치고)

제이미 캐러거 :

"챔피언스리그에서 위대한 활약을 했던 이니에스타, 샤비 같은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 모드리치는 어느 위치에 있는 것 같은가?"


티에리 앙리 :

"모드리치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 챔피언스리그 뿐만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모드리치는 메시-호날두의 발롱도르 독점을 깬 유일한 선수다. 심지어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했는데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모드리치가 파리와 첼시를 상대로 보여준 퍼포먼스는 굉장했다. 아웃프런트, 상대 수비라인을 파괴하는 패스, 활동량 등등... 40살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이런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어제자 리오 퍼디난드(아래 사진) :

"지네딘 지단은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있지 않다. 그는 더 위에 있는 선수다. 하지만 모드리치가 샤비, 이니에스타와 같은 급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해야 한다."


모드리치 vs 샤비, 이니에스타 논쟁 - 모드리치 중심 가상 문답

  2018년 9월 모드리치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직후 쓴 글이다. 하지만 이때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 전이었고, 이전에 보여준 활약을 충분히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모드리치 중심 문답이었다. 하지만 모드리치는 결국 발롱도르까지 수상했고, 4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레알 마드리드에서' 최고의 선수다. 이 글을 쓴 나조차, 모드리치가 이렇게 잘할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정말 대단하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2021 피파 올해의 선수 선정 축구 기타 자료





- 2021 FIFA 올해의 선수상 (남자) 순위 (감독 투표 25% + 주장 투표 25% + 기자단 투표 25% + 팬투표 25% 반영)

1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48점

2위 리오넬 메시 44점

3위 모하메드 살라 39점

4위 카림 벤제마 30점

5위 은골로 캉테 24점

6위 조르지뉴 24점

7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3점

8위 킬리안 음바페 16점

9위 케빈 더 브라위너 11점

10위 네이마르 10점

11위 엘링 홀란 7점

 


- 2021 FIFA/FIFPRO 남자 세계 베스트 11 (전 세계 프로축구 선수들이 투표하여 선정)

※ 3-3-4 포메이션

골키퍼 : 지안루이지 돈나룸마

수비수 : 후벵 디아스 - 레오나르도 보누치 - 다비드 알라바

미드필더 : 은골로 캉테 - 조르지뉴 - 케빈 더 브라위너

포워드 : 리오넬 메시 -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 엘링 홀란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레반도프스키가 2년 연속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2년 연속 수상한 것도 대단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피파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수상자가 다른 해가 나왔기 때문에 특별히 결과를 올린다. (두 상의 수상자가 달랐던 마지막 해는 2004년 : 피파 올해의 선수 - 호나우지뉴, 발롱도르 - 셰브첸코)

  수상에 영향을 줄 만한 두 선수의 상황을 정리했다.


리오넬 메시

▲ 
-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마침내 (코파 아메리카)우승을 이루고, 파리로 이적하며 경기 외적으로도 주목을 받음
- 2021년(20-21시즌이 아닌) 활약이 좋음
- 벤제마(프랑스 네이션스리그 우승)을 제외한 주요 경쟁자들(레반도프스키, 호날두, 음바페 등)이 모두 대표팀에서 성과를 얻지 못함
- 현역 최고라는 인식

- 20-21시즌 클럽(바르셀로나)에서는 코파 델 레이 우승 뿐
-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주요 경쟁자였던 음바페에게 대패(+ 최근 수 년 동안 챔피언스리그에서 반복되는 참패)
- 다른 경쟁자들보다 앞선다고 보기 어려운 경기력
- 이적 이후 맞이한 새로운 시즌에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매우 심각한 부진, 보통의 선수들보다 부족한 모습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 20-21시즌 리그 28경기 41골 달성 : 71-72시즌 게르트 뮐러의 리그 골기록을 49년 만에 경신, 21-22시즌에는 게르트 뮐러의 분데스리가 한 해 최다골도 경신
- 유럽 골든슈 + 리그 우승
- 소위 다른 선수들과 '급'이 다르다고 인식하는 여론 : 특히 최근 3년 동안은 메시를 포함한 모든 선수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을 정도
- 2021년 활약 자체가 메시보다 레반도프스키가 작년 내내 더 일관적이면서 뛰어났다(2021년 한 해 최다골 : 69골)

- 20-21시즌 바이에른 뮌헨이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파리 생제르망에게 (일반적인 예상보다 일찍) 탈락, 다만 레반도프스키는 8강에서 모두 부상으로 결장
- 유로 2020에서 폴란드 조별리그 탈락(그나마 본인은 분투한 게 가산점 - 3경기 3골, 팀내 유일 사람다운 활약)


  두 선수 외에는 수상을 다툴 후보가 없어서 다른 선수들은 생략한다. 이 밖에는 투표기간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작년 기준 10월에 투표를 마친 발롱도르와 달리, 피파 올해의 선수는 12월 초에 투표한 덕분에 레반도프스키의 활약과 메시의 부진이 더 반영되었을 것이다.






게르트 뮐러 - 전술이 통하지 않는 존재 축구 글


  2021년 8월 15일, 게르트 뮐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75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게르트 뮐러

※ 클럽 경력 (독일 위키 기준)

1963-1964 TSV 1861 눼르디링겐 31경기 51골
1964-1979 바이에른 뮌헨 607경기 566골
1979-1981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71경기 38골
- 프로 통산 709경기 655골

*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우승 : 1968–69, 1971–72, 1972–73, 1973–74
DFB-포칼 우승 : 1965–66, 1967–68, 1968–69, 1970–71
유러피언 챔피언스컵 우승(현 UEFA 챔피언스리그) : 1973–74, 1974–75, 1975–76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 1966-67
인터콘티넨탈컵 우승 : 1976



※ 국가대표 경력

서독 국가대표 A팀 : 1966-1974, 62경기 68골

1970 멕시코 월드컵 3위
1972 유러피언 챔피언십(현 유로) 우승 (vs 소련 3:0 승)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vs 네덜란드 2:1 승)



※ 개인 경력

키커지 선정 독일 올해의 선수 : 1967, 1969
발롱도르 : 1970
토어예거카노네(분데스리가 득점왕) : 1966-67, 1968-69, 1969-70, 1971-72, 1972-73, 1973-74, 1977-78
유러피언 챔피언스컵 득점왕 : 1972-73, 1973-74, 1974-75, 1976-77
- 유러피언컵 통산 35경기 34골 (유럽 클럽대항전 통산 71경기 62골)
유러피언 골든부츠 : 1969-70, 1971-72
월드컵 골든부츠 : 1970
역대 월드컵 득점 3위 : 13경기 14골 (1970, 1974)
유러피언 챔피언십 골든부츠 : 1972
유로 베스트 팀 : 1972

- 발롱도르 순위
1967 7위 (공동)
1968 20위 (공동)
1969 3위
1970 1위
1971 6위 (공동)
1972 2위 (공동)
1973 3위
1974 7위
1975 17위 (공동)
1976 9위 (공동)

게르트 뮐러 vs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골장면 (1973-74 유러피언컵 결승전 재경기, 2골)

게르트 뮐러 vs 레알 마드리드 (1975-76 유러피언컵 준결승 2차전, 2골)




  게르트 뮐러는 한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혼자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포포투>는 축구 역사상 가장 우아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가장 뛰어난 득점력을 과시했던 스트라이커를 조명한다. - 2008년 6월 <포포투> 칼럼



  위대한 스트라이커들은 모두 '치명적'이거나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스트라이커보다 더 많은 골을 퍼부었던 '데르 봄버'(Der Bomber, 폭격기) 게르트 뮐러는 죽음 그 자체였다. 득점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들 모두 '암살자' 아니면 '킬러'와 같이 죽음과 연관된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뮐러에게는 '낫을 든 사신'이 더 어울린다. 그라운드 밖의 뮐러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바이에른 근처의 뇌르틀링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방직공이 되려고 했다. 축구는 취미에 불과했지만 그는 결국 프로 선수가 됐다. 엄청난 수의 관중 앞에서 마법과 같은 골 결정력을 선보이면서도 뮐러는 항상 겸손했으며 수줍음이 많았다.

  그러나 폭탄과 같은 그의 골 결정력(서독 대표팀 62경기 출장 68골,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427경기 출장 365골)은 전설로 남았다. 폭발적인 득점력 덕택에 그는 다른 선수들이 범접하기 힘든 수의 트로피들을 안았다. 1974년 월드컵, 1972년 유러피언 챔피언십, 3연속 유러피언 컵(1974~1976), 4번의 마이스터샬레(분데스리가 우승), 컵 위너스 컵, 독일 컵. 그리고 더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시가를 피고 있는 뮐러와 브라이트너


  국가대표팀과 클럽에서 뮐러와 함께 뛰었던 파울 브라이트너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린 매 경기 자신감에 차 있었어요. 축구가 쉽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웃겼어요. 경기가 아무리 안 풀려도 그가 딱 한 순간, 한 번만 공을 건드리기만 하면 골이 터질 거라는 느낌이 있었죠. 게르트 뮐러가 팀에 있다면 전술이란 게 필요 없어요. 그가 없다면 전술적으로 완벽한 경기를 펼친다고 해도 승리할 수 있었을지, 아니 최소한의 도움은 되었을지 의문이네요. 우리 팀의 성공을 위해선 뮐러가 필요했고, 우리에겐 그가 있었죠."

  그러나 눈앞에 드러나는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뮐러는 세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점점 줄어드는 게 현실이다. 뮐러가 잉글랜드 출신이었다면 각종 거리와 축구 경기장에 그의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또한 셀 수 없는 책들과 영상들이 그의 신비함과 상징성을 조명했을 것이다. 독일에도 그의 동료인 귄터 네처와 프란츠 베켄바워에 열광하는 무리들이 생겼지만, 뮐러에게 돌아오는 관심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뮐러가 축구계의 그레타 가르보(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36세에 돌연 은퇴한 뒤 1990년 사망하기까지 철저한 은둔생활을 했다)였기 때문이다. 브라이트너는 뮐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프란츠 베켄바워나 요한 크루이프처럼 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슈퍼스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선호했고, 가족들과 조용히 살고 싶어했죠."

  그러나 뮐러 역시 젊은 시절에는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뮐러는 'Dann macht es Bumm(이제 쾅하고 터진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한 손에 축구공을 들고 다른 팔엔 상반신 누드의 금발 미녀를 끼고 서 있어야 했다. 그의 표정은 분명 창피해 죽으려는 얼굴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의 뮐러는 나무통만한 허벅지를 지녔었다.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센터 포워드라고 생각하기는 힘든 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전혀 축구 선수 같지 않았다. 그가 1964년 바이에른 뮌헨에 입단했을 때, 당시 감독인 카요브스키는 뮐러가 역도 선수 같다고 비웃으며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10경기를 벤치에서 보낸 후 클럽의 회장이 개입해 그의 출전 기회를 만들었다. 프라이부르크와의 경기에 나선 뮐러는 2골을 넣었고, 이후 계속해서 골을 넣었다.

  사실 뮐러는 방직공이 되지 않고 축구 선수가 된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에게는 타고난 주력으로 치고 나간 뒤, 좁은 공간을 파고 들어 다른 선수들을 제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무게 중심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뮐러가 한 가지 더 갖추고 있었던 것은 바로 독일인 특유의 목표 의식이었다. 브라이트너는 독일인 만의 목표의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인이 어떤 스포츠를 배울 때는 오직 이기기 위해 하는 겁니다. 남미 선수들처럼 발재간을 부리는 선수는 없습니다. 아마추어, 프로팀, 성인 팀, 유소년 팀, 국가대표팀 모두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것이 독일 축구의 성공 원동력입니다."

  브라이트너는 뮐러 역시 같은 목표의식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술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뮐러는 굉장한 선수였어요. 완벽한 선수였고, 특히 헤딩은 더 뛰어났죠."


완벽한 조화 : 베켄바워와 뮐러는 다르지만 완벽한 조화를 보여줬다. 뮐러는 베켄바워를 단 한 마디로 요약했다. "누구도 그와 같을 수는 없다."


  축구팬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그의 기록은 고향팀인 TSV 뇌르틀링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62-63시즌 뇌르틀링겐은 총 203골을 넣었는데 당시 17세였던 뮐러는 이 중 180골을 터트렸다. 그는 1970년 월드컵 유럽 예선과 본선에서 경기당 2골씩을 넣었고, 1965년부터 1978년까지 바이에른의 시즌 최다 득점을 독식했다. 국가대표팀에서 보여준 골 결정력을 비교할 때 뮐러는 페렌츠 푸스카스(84경기 83골)나 호마리우(74경기 56골)의 기록을 뛰어넘는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뮐러가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을 상대로 뛴 경기에서도 꾸준히 득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18경기를 뛰었고(유러피언 컵 결승전 3회, 월드컵 본선과 유로 대회 본선 15회), 그 18번의 경기에서 21골을 넣었다. 그를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수비수가 있을까?

  기이하게도 모두가 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뮐러는 자신을 막는 상대 수비수들이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1975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의 수비수 폴 마들리는 뮐러의 연기에 완전히 놀아났다.이미 중반을 넘긴 시점이었다. 리즈는 훌륭한 경기를 펼치며 바이에른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는데, 정당한 골이 무효 판정이 난 데다 페널티 킥 기회마저 심판의 오심으로 날리며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 게다가 바이에른의 프란츠 로스가 찬 운 좋은 장거리 포에 얻어맞아 한 점을 뒤지고 있었다. 그때 뮐러는 자신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저 없이 마무리 지으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사실 기회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뮐러는 공과 마들리에 비해 한참 처져 있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뮐러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를 선보이며 전방으로 뛰어들었고, 마들리를 지나쳐 발 안쪽으로 공을 골문에 밀어 넣었다.


또다른 황제


  뮐러의 위대함이 빛났던 또 다른 순간을 살펴보자. 그는 마치 영국의 코미디 캐릭터 ‘미스터 빈’처럼 어수룩한 모습으로 1974년 월드컵을 맞이했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낮은 크로스가 올라오자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날렸다. 뮐러는 공에 한참 못 미치는 듯,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발끝에 공이 닿았고, 공은 그대로 수비수와 골키퍼를 지나 골망을 갈랐다. 황당하겠지만, 그 경기도 그렇게 끝이었다. 이런 어리숙한 모습을 두고 혹자는 비열한 행위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당 역할을 한다고 해서, 배우가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뮐러는 진정한 신사였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주심 잭 테일러는 그의 완벽한 골에 오프사이드 반칙을 판정하며 무효화했다. 그러나 뮐러는 단 한 번의 항의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경기를 계속했다. 어떤 축구 선수가 그럴 수 있을까? 뮐러는 특유의 골 결정력으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때로는 굉장히 멋진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 중 한 골은 1974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나왔다. 뮐러는 높이 날아온 크로스를 완벽하게 잡은 뒤, 좁은 각도에서 아틀레티코의 골키퍼 머리 위로 공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뮐러 생애 최고의 골은 이날 경기의 두 번째 골이었다. 바운드가 걸린 스루패스를 겨우 잡아낸 뮐러는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는 로빙슛을 구사했다. 그라운드로 떨어지던 공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그 각이 어찌나 컸던지 크로스바 아래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들어갔다. 데니스 베르캄프라도 이 골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으리라.


초자연적인 존재 : '전술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진 뮐러는 서독에게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었다.


  게르트 뮐러는 때로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발휘하는 듯 했다. 이러한 능력은 뮐러 자신에게도 불가사의였다. "전 수비수가 언제 실수를 할지, 아니면 언제 긴장을 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한 번은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제 안의 누군가가 지시를 내려요. '뮐러, 이쪽이야.' '뮐러 저쪽으로!'"

  그렇다면 수 년간 뮐러와 함께 뛰었던 브라이트너는 그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아니요. 제가 보기엔 뮐러 본인도 자신의 비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궁금함조차 사라졌죠. 독일에서는 그냥 뮐러에게 '제7의 감각'이 있다고 해요. 그는 수비수가 공을 어디로 걷어낼지 그 수비수보다 먼저 알고 있었죠."

  게르트 뮐러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궁극적인 순간은 1970년 월드컵 준결승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나왔다. 독일의 공격 상황, 우베 실러는 이탈리아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헤딩 패스를 연결했다. 그러나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골키퍼를 포함하는 이탈리아의 철벽 수비진 4명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게르트 뮐러의 '제7의 감각'이 빛을 발했다. 뮐러는 특유의 급가속을 발휘하며 골문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다. 뮐러가 수비수 파브리지오 폴레티가 실수를 범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어 골키퍼 알베르토시가 공을 처리하는데 주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다.

  뮐러는 두 이탈리아 선수 사이의 공간으로 밀고 들어갔다. 득점은 불가능해 보였다.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없었고 골키퍼가 골문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뮐러는 가까스로 공에 머리를 갔다 댔고, 공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이 대목부터 모든 것이 영화 속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이어진다. 수비수 폴레티는 위치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알베르토시는 점프를 하지만 공에 미치지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진 채 공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도 공을 쳐 내지 못한다.


1975-76 유러피언컵 준결승, 적으로 만난 뮐러와 브라이트너


  1979년 바르셀로나의 매력적인 영입 제의를 거절한 뮐러는 그만 바이에른의 새 감독과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결국 그는 점차 추락해가는 미국 프로축구 MLS의 전신, NASL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 입단한 뒤 1982년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채 축구화를 벗었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했던 뮐러는 바이에른으로 돌아온 후 거의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으며 종일 TV를 봤다. 통장 잔고 역시 점차 줄어갔다. 1991년 그는 생물학적으로 거의 죽은 사람이었다. 건강한 간은 감마 GT 검사에서 10에서 70 사이를 유지하는데, 당시 뮐러의 간 수치는 2400이었다.

  그는 과거의 팀 동료인 베켄바워와 회네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고, 둘은 그에게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도록 종용했다. 두 친구는 뮐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이에른에서 코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92년 이후 그는 현재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뮐러는 지금 젊은 날에 경험하지 못한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단순하지만 조심스럽게 계획된 삶을 살고 있으며, 인터뷰에도 거의 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돈을 위해서 가끔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다. 최근 출연한 한 은행 광고에서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팬을 눈앞에 두고도 절대 입을 떼지 않는다. 끊임없이 떠들던 팬은 이내 포기하고 그를 떠난다.


골이 고픈 뮐러


  최근 게르트 뮐러의 이름이 스포츠지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의 골 기록이 위협받을 때 뿐이다. 2006년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그간 이어지던 그의 월드컵 통산 최다골 기록을 깨뜨렸다. 그러나 호나우두의 기록은 뮐러의 기록보다 결정력 면에서 훨씬 뒤처진다. 뮐러가 2번의 월드컵에서 13경기에 나서 14골을 넣은데 반해 호나우두는 3번의 월드컵에서 19경기에 나서 15골을 넣었다. 지난해(2007년) 12월 유럽축구연맹(UEFA)은 AC 밀란의 필리포 인자기가 유럽 클럽 대항전 총 98경기에 출전해 63골을 넣었다고 발표했다(이는 인터토토컵과 슈퍼컵까지 포함된 기록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UEFA의 실수로 뮐러의 3골이 누락된 탓이었다.

  아직도 뮐러는 자신의 뛰어난 장기 중 하나를 유지하고 있다. 무게 중심을 낮게 유지하는 것 말이다(영미권에서도 잘난 체하거나 허영심 많은 사람에게 방방 뜬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브라이트너는 뮐러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찾았어요. 사람들은 뮐러가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일 것이라 예상하지만, 아니에요. 그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만약 단 한 명의 절친한 친구가 필요하다면, 게르트 뮐러로 충분합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충직한 사내입니다. 그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요."

  폭격기는 긴 임무를 마치고 평화롭게 착륙했다.





초월적 외교 - 현재가 최선이다. 잡담





  호주의 퍼스 미국·아시아센터(Perth USAsia Centre) 수석 연구원 해일리 체너(Hayley Channer)가 지난 6월 30일 <디플로마트(THE DIPLOMAT)>에 쓴 기고글(1). 이 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남방정책을 설명하며 현재의 신남방정책은 한국의 이익을 확보하는데 그친다고 비판하고, 신남방정책의 안보협력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호주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도 지적한다. 그래서 한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신남방정책을 더욱 확장하여, 지역안보 질서에 더 큰 발언권과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문재인 정부가 현재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이용해 이익을 얻어가고 있는데, 이제는 이걸 그만두고 호주, 일본, 미국과 함께 반중전선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해보이지만, 이 글의 의도를 거칠게 표현하면 '호주를 위해서 한국이 고기방패가 되어달라'는 뜻이다. 다들 반중을 외치는 쿼드 국가들이 정작 중국의 압박은 한국이 대신 받아주길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우리는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굳이 왜? 우스울 뿐이다. 




  미국과 가깝지만 중국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친미정책에 올인하지 않고도 중국의 영향력은 줄여나가고 있는(2) 덕분이다. 미국은 한국과 친할수록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전보다 더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중국은 한국과 친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교류를 유지한다. 결국 한국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지향하는 외교정책은 분명하다. 모든 국가와 적절한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어느 국가에게도 미움받지 않는(현재는 일본이 예외(3)), 견실하고 소위 선한 국가로 자리잡는다. 앞으로도 다자외교에서 영향력을 갖고 국익을 추구한다. 문정인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초월적 외교'에 가깝다. 문 대통령의 외교 정책을 다른 사람이 이후에도 지금처럼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항상 고도의 줄타기, 연횡책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능력이 필요하다. 쉽지는 않아 보인다.


(1) 기고글에서 인용한 제프리 로버트슨 교수의 의견에는 왜곡된 시선이 보인다. 이 사람에 대해 대충 찾아보니 예전에 한국-호주 의원친선협회 한국 측 의장인 원유철을 만난 기록도 있고, 여러 행적들이 꺼림칙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2) 문재인 정부의 주요 정책들은 모두 중국의 영향력을 줄여나가는 목적이 있다 : 신남방정책, 신북방정책, 미사일 지침 해제와 독침전략, 해/공군 비중 강화로 상징되는 국방정책, 해운산업 부활, 다자외교, 북-중-러에서 북한과 러시아를 연횡책으로 느슨하게 만들면서도 중국과 적절히 밀당하며 친선 관계 복구 및 유지

(3) 해상자위대 초계기의 위협비행 사건, 우리 대법원이 일제 기업들의 강제징용 범죄를 유죄 판결한 걸 트집잡아 무역보복을 일으켜 자폭, 그 외 일제의 수많은 과거사 범죄 - 문재인 정부에서는 항상 일본이 먼저 분쟁을 만들고 스스로 폭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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